Wednesday, April 25, 2012

용서는 정말 좋은 것일까? 복수는 달콤한 것일까?


 용서는 정말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바람직한 것일까? 그러면 복수는 달콤한 것일까?

 답부터 이야기하자면 용서는 바람직하지 않고, 복수는 달콤하지 않다.

 1. 우선은 영화이야기다.

 영화 "오늘"은 송혜교 주연, 이정향 감독이 연출한 2011년 작품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송혜교의 빅팬은 아니고 (그렇지만 그녀가 순풍 산부인과에 나왔던 그떄의 "충격"은 다른 내 학번 친구들과 공유하고 있다) 미술관 옆 동물원 같은 작품을 좋아하지 않기에, 이 영화는 나의 선택은 아니었다. 와이프가 추천한 이 영화에서 오늘할 이야기인 "복수"와 "용서"가 나온다.

영화 "오늘"의 대강의 이야기는 (이하는 Daum 영화에서...)

"자신의 생일날 약혼자를 오토바이 뺑소니 사고로 잃은 다큐멘터리 피디 다혜. 용서하면 모두가 행복해질 거라는 믿음으로 가해자 소년을 용서하고 1년 후 용서라는 주제로 다큐멘터리 기획, 다양한 사건의 피해자들을 찾아 다니며 촬영을 시작한다. 촬영이 진행될수록 자신이 용서해준 17살 소년을 떠올리게 되는 다혜. ‘착하게 살고 있겠지’ 라는 생각으로 담담히 촬영을 진행하던 중 우연히 전해들은 그 소년의 소식에 커다란 충격에 빠지게 되는데…"

라고 되어 있는데 요약하자면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용서"를 하고자 사고친 뺑소니 소년을 용서해 주었더니, 알고보니 그 소년은 부자집 자식으로 실력좋은 변호사가 붙은 아이로, 쉬운 용서 이후 대담하게 오토바이 운행을 해서 추가로 사망자를 더 내었더라는 이야기이다-


종교에서는-특히 기독교나 천주교 계열에서는 (혹은 이 영화상에서만 인지는 모르겠지만)-용서를 숭고하고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 영화에서도 천주교/기독교 계열의 종교인들이 용서를 "강요"하는 듯한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에 대해서 화두를 던지는 것이 이 영화이다.

나는 기독교/천주교 신자는 아니다. 그렇지만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좋아하는 것은 그가 어려운 내용을 굉장히 쉽게 풀어서 이야기해주는 "대가"이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말중의 하나인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로..."를 생각하며 이 화두를 풀어보자 (즉, 예수/부처가 아닌 시장통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맞는 답을 찾아 보자는 것이다).

화두 : "용서"는 바람직한 것일까?

답 : 아니다 (적어도 땅위에서 사는 우리에게는 아니다.)

2. 왜 땅위에서 용서는 바람직하지 않을까 : 미국 사람들은 실험하기를 좋아하지...

"Tit for Tat" 전략이라는 것이 있다. 1980년도에 반복된 죄수의 딜레마를 위한 게임 이론에서 고안된 전략인데 (이 부분은 게임 이론과 경제학등의 기초가 필요한데...이해에는 주요한 것이 아니므로 일단은 패스한다), 우리가 사는 일상생활에서 나에게 "사기치는 놈" "피해를 주고도 유유자적하게 잘 사는 놈" 그리고 그렇게 거창하지는 않더라도 회사나 조직생활에서 "뒤통수를 치는 놈"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게임이론으로 한번 생각해 본 것이다.

이전략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상대방이 먼저 자극하지 않으면 일단 "협력"한다.
("협력"한다는 의미는 같이 비즈니스를 하거나 신뢰를 한다는 말이다)
2. 만약 상대방이 배신을 하면 반드시 "보복"/"복수"를 한다.
3. 보복한 이후 상대방을 다시 만나면 다시 일단 "협력"한다.
(비즈니스에는 영원한 적은 없다. 필요하면 원수와도 손을 잡는다).
4. 상대방과는 두 번 이상의 만날 기회가 있어야 한다.


이 전략을 송혜교의 경우에 적용해 본다면

송해교는 이 전략에서 2번 "보복"/"복수"의 부분이 빠져 있기 때문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교통사고와 같은 불법행위/"torts" 문제에서 서로간에 교통 규칙을 지키리라는 "선의"가 "배신"을 당했다면 이에대해 "보복"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보복은 민사적인 제재이던 형사적인 제재이던 다 필요하고, 그 이후에 상대방을 용서하라는 것이 이 전략의 내용이다. 소위 말하는 "청동룰"과 같은 것이다.

청동룰("Bronze Rule")은 "Do unto others as they have done unto you"-"남이 너에게 하듯 그들에게 하라"라고 하는 것으로 기본적으로 방금 말한 전략과 같은 것이다. (황금률은 "절대 보복을 안해"-"I would never pay to harm another!"정도 되겠다).

왜 청동룰이 필요한가? 그 이유는 우리 모두가 부처나 예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상대방의 배신에 복수를 안하게 된다면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쉬운 사람"이라는 시그널을 보내게 되고, 어느 순간 본인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용당하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직장내에서의 인간 관계에서도 "묵묵히 일만하는 사람"은 성실하고 듬직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 보다는 상사에게나 동료 심지어는 부하직원에게도 이용당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니라고 하시는 분은 한번 주위를 잘 둘러 보시라. 본인이 이런 "나이스 가이"일 수도 있다). 때로는 값싼 "애정"보다는 "경외"가 더 필요한 것이 비즈니스 세계이다.

종교에서는 모든 인간은 근본적으로 선하고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이 이야기는 맞을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우리는 상대방이 이런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없기에 "이기적이고도 합리적인 인간"을 상정하고 "배신"에는 "복수"라는 시그널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모든 사람이 상대방을 전적으로 이해하는 천국이 오기까지 "땅위"에서 이루어 져야 하는 일이다.


3. 복수는 해야한다. 단 그것은 달콤해서는 아니다.

복수자체는 달콤하지 않다. Kevin M. Carlsmith, T imothy D. wilson, 그리고 Daniel T. Gilbert는 "The Paradoxical Consequences of Revenge"라는 논문에서 복수는 달콤하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2007년에 있었던 조승희의 버지니아 테크 살해사건을 언급하면서 시작하는 이 논문은 복수를 한 사람들이 복수를 하고자 하였지만 안한 사람들보다 더 기분이 나빠졌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즉, 복수는 기분을 좋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복수를 하기 직전까지 에너지를 줄 뿐, 복수를 한 후에는 기분이 나빠지게 된다.

그렇지만, 내가 인생을 편하게 살기 위해서, 또 다시사기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사기를 당하는 사람을 보면 계속해서 당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사기를 당한 사람이 "soft"하다는 평가를 얻기 때문이다-친구들간에 돈을 빌리는 관계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그리고 도와주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기 위해서는 "복수"를 해야 한다.

"복수"는 해야 한다. 단 그것은 달콤해서는 아니다. 그것은 내가 인간답게 존엄하게 살기 위해서다.

p.s. 복수를 한 후에, 그 사람을 내 마음속에서 지워버리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이다. 복수를 하지 않고 억지로 용서를 한답시고 있다보면, 내 마음은 가해자에게 다 삼켜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살다보면 배신이라는 첫번째 화살은 맞을 수 있지만, 가해자에 대한 억지 용서로 인한 집착은 두번째 화살이고 이는 피할 수 있는 것이다.

잔인하고도 아름다운것이 이 세상이고, 우리는 그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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